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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深夜

동암 구본홍 2023. 8. 11. 17:39

 

 

심야深夜 

 

달 없이 오는 밤의 젖꼭지를 꺼내던 시골집 앵두나무는

얼마나 발을 헛디뎠을까

동구 밖에 주저앉은 바람을 불러다 눈두덩 꿰매던 어머니

먹감나무 위에 걸어둔 까마귀 얼굴로 밥상 뒤집어

하늘에 시비할 궁리가 남았는지

출몰이 잦아진 거미들이

옭아맨 눈물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맡이

어금니처럼 평평해지는 시간,

다세대주택 옥상에 널어둔 사각팬티가 안정을 찾아가듯

늙어간다는 게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죄스러워지거나 말거나 구불구불

길을 나서는 화사花蛇의 시간

 

한 여자의 지아비로 살기엔 너무 늦어버린

몸의 가장 가파른 곳에 도사리고 앉아

밥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지

꽃과 살을 섞고 싶을 때가 있지

가뭄 든 논둑의 뱀딸기처럼 등 돌려 우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듯

사는 게 고마워지거나 말거나 미안해지거나 말거나

가만히 절벽처럼 앉아

실밥 터진 목숨 한 자락 비치는 날이면 휘휘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딴전 피듯 만지작거리는

내 몸이 절경絶景이다

 

식은 라면냄비 속에 풀어진 달의 머리카락 한 올 건져 올리는 동안

개구리처럼 눈만 툭, 불거졌던 성기가 죽었다

꽃과 밥 사이를 오가던 무지렁이 사내 하나 꿈틀꿈틀

밟히면 밟힐수록 꿈틀꿈틀

한세상이 꿈틀한다

 

사과가 엄마를 골랐다

 

1.

사과가 쪼글쪼글해졌다 입이 궁금할 때 깎아먹으라고 애인이 보내준

혀가 시들었다 시들기 전 잠시 지루해지는

사과는 낙관적이다 바나나처럼 미끄러지기 쉬운 고요의 시간

허공으로 열렸던 입술이 툭, 바닥으로 떨어진 방안 가득

조용히 썩어가는 사과의 새콤달콤하게 졸린 냄새가

모기향과 함께 정답게 피어올랐다

유방(乳房)부터 도려냈다

2.

박정임, 사과를 좋아하는 여자지만 사과가 싫어하는 여자

오렌지라고 좋아할 리 없는 며느리밑씻개 같은 그녀를

아버지는 개다리소반 위에 올려놓고 살았다

마른 아귀처럼,

생선에 열광하는 아버지와 그의 피를 이어받은 고양이를 위해

뼈를 발라내는 여자는 죄(罪)가 없다

사과가 그녀를 골랐다

3.

쪼글쪼글 칼도 들어가지 않는 칠순 노모를

아직도 엄마라 부르는 이즈음의 나는

아무래도 고아다 벌레 씹은 얼굴로 썩어간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등에 칼을 꽂은 애인이 킬킬거리며

썩어간다 썩는 줄도 모르고

엄마가 썩어간다 무럭무럭 한세상이

맛있게 썩어간다

 

묘혈墓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루해진 애인 네 번째 생일을 건너뛴 4일이나

13일의 금요일쯤이면 떠오를지 몰라

넥타이 꽉 졸라맨 목으로부터 시작되는 둥근 파문,

빨간 사인펜으로 달력에 동그라미 치듯

 

38번 국도변 수박 몇 덩이 사이로 쪼글쪼글 웃는 할머니

꼭지 떨어진 얼굴에 담배꽁초 비벼 끄고 줄행랑치는 그랜저꽁무니에 매달려가는 저기,

단 한번도 지상으로 내려놓지 못한 두레박이거나 똥바가지거나

아니지, 죽어도 내 것은 아니라고 이즈음 나는 울 때마다 머쓱해진다

수세기 전의 늪에도 제 얼굴을 그려 넣지 못한 물푸레나무에게

눈 작은 벌레들에게 미안해진다 애당초 내 것은 없었으니 허공에 판 구덩이였을 뿐이니

 

새가 운다 텅 빈 둥지 하나 라면냄비처럼 밑이 그을린 나무의 얼굴 하나

허공에 걸어놓고 울어올 때 어쩌냐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당신은

또 어쩌냐 서로에게 미안해서 어쩌냐

 

내 것도 아닌 얼굴로 자위나 하고 살았다니

까맣게, 까마귀 떼들이 상주였다니

 

연애의 생산성/김륭

 

#염화미소拈華微笑

어떤 날은 연애란 것이 장닭 벼슬처럼 만져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애인과 꼭 통닭을 시켜먹는다 암소갈비를 좋아하는 당신에겐 개 풀 뜯어먹는 소리겠지만 생生을 탁발托鉢 중인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내게 연애란 일종의 탱화, 헐렁한 바지주머니 속을 꼬깃거리던 만 원짜리 지폐 속에서 그녀의 손때 잔뜩 묻은 미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연애는 내 몸의 가장 믿을만한 곳에서 발견된 암자 같은 것이다

 

#달빛

아직 눈물을 갈아 끼우지 못한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중이다 화장이 먹히지 않는 가난을 사면 먼지를 덤으로 얹어주는 구멍가게 지나 달동네 언덕바지 퉁퉁 불어터진 컵라면 같은 성욕을 위해 별 할 일이 없어진 나이가 이맛살 찌푸리고 앉아 팔다리를 자른다 나는 결혼 후 남편과 밥 먹듯이 관계를 가졌지만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그녀의 오르가즘을 두루마리화장지처럼 말아 쥐고 밤새 피를 돌린 적이 있다

 

#장닭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날의 내일은 푸드덕, 털이 뽑혀서야 15층 아파트를 날아오르는 닭 날개 혹은 수영을 배우러갔다 눈이 빨개져 돌아온 그녀의 겨드랑이 같은 것이다 가끔씩 밥그릇보다 가벼운 마음이 몸을 깨울 때가 있다 백 년 동안의 가난이나 슬픔이 추파를 던질 때면 몸이 뜨거워지는지 임신 중인 그녀가 식은 밥을 물에 말고 있다 잠이 덜 깬 내 몸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 콕콕 쪼아놓는 아침, 알이 굵다

 

비늘/김륭

 

당신은 옷을 벗고 있는 중이고 나는 휘둥그레 뜬 눈을 당신의 배꼽에 매달고 있는 중이다 단추의 기원이다 당신과 나를 위해 세상이 잠시 눈을 감아주는 순간이 있다

 

물고기가 잘라버린 혀를 하늘에서 만진 적이 있다. 늙은 오리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노란 물주전자처럼 앉힌 자리, 팬지꽃 코사지 장식이 달린 당신의 드레스가 물비늘로 촘촘해지는 동안

 

나는 당신의 등 뒤에서 달을 꺼낸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촉감,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을 팔딱거리며 부패의 각을 세운 거다. 슬쩍 그림자를 벗어던진 새떼들 아니, 바람에 꿰인 생선구이 한 접시 까맣게

 

까맣게 떠가는 하늘 한 귀퉁이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빈곳을 떠오른 것이다.

 

길이 뒤엉킨 거미 뱃속에 걸린 날개를 만지작거리듯 침대 밑으로 벗어던진 당신 드레스와 내 줄무늬 양복은 애당초 단추가 달려있지 않았던 거다. 둥둥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몸을 바짝, 잡아당기고 있던 죽음의 각질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서로의 몸을 물처럼 통과하는 죽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희번덕거리기 시작하는 한밤의 갈증, 제 그림자를 물에 적시지 않는 물고기들에게 비늘은 옷이 아니라 단추다.

 

세상의 모든 눈이 반짝, 나와 당신의 급소를 꿰고 있다.

 

가을의 발성법發聲法 / 김륭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은 앞집사내의 성욕이 여름을 지나 대문간에 묶여있다

가을은 그렇게 나를 버렸다

출퇴근길마다 욕을 퍼부었다 개새끼,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해 겨울

그녀를 만났다

 

텔레비전조립공장에 다니는 누이보다 혈통이 좋은 개를 부둥켜안고 죽고 못 살던 그녀의 처녀성을 눈밭에 심고 기다렸지만 끝내 봄은 오지 않았다

 

그녀의 등짝이 거울 뒷면 같았다 나는

욕 대신 꽃을 퍼부었다

 

또다시 여름을 지나 나는 가을을 털이 빠져 죽은 개처럼 사과나무 밑에 파묻었다 덥석, 한 입 깨문 사과에 피가 묻어났다 사과가 품고 살던 벌레가 묘혈을 판 바로 그 자리에 나는 얼굴을 묻었다

 

 헐떡거리는 앞집사내의 성욕과 나에게 바친 그녀의 처녀성을 추궁하기도 전 달이 우수수 바람에 떨어졌다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이빨 사이 이쑤시개처럼 낀 사과나무의 시든 피를 보았다

 

눈물보다 흔해빠진 피의 흔적들, 아무래도

 

피는 사람을 잘못 살았다

 

살부림/김륭

 

그대를 사랑한 후 알았다 단말마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꽃이다, 칼보다 먼 곳에 살던 꽃이 쓰윽 걸어들어 오면서

내게도 급소가 생겼다

 

모든 칼은 한때 꽃이었다 바람의 발바닥을 도려내던 머리맡에서 피보다 진한 눈물을 도굴했다 나는, 그대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금 태어났거나 이미 죽어버린 구름이다

 

해바라기 꽃대에 목을 꿴 그대 눈빛을 보고 알았다 바람에 등을 기댈 수 없는 꽃은 칼이 된다 악연이다 우리의 사랑은 구름 속에 꽂혀있던 나를 뽑아 나무의 허리를 베고

새의 날개를 토막-치면서 시작된 것이다

 

칼로 물 베기란 붉은 살을 가진 물고기비늘에 필사된 천지검법의 하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상대를 바닥에 눕히는 필살기 죽어도 사랑한다는 독침이 꽂혀있는

애무의 마지막 초식이다

 

변태가 불가능한 체위다 지상의 모든 사랑은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졌다 늘 손잡이 없는 칼을 품고 다니며 축지법에 능통한 법 훌쩍, 한손의 고등어처럼

그대와 내가 다녀온 하룻밤의 별을 식히는 동안 절정을 맞는 것이다

 

 피바람 몰아치는 무림천국을 흥미진진한 동물의 세계로 잘못 알고 뛰어든 멧돼지나 노루가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 꽃을 피워 올리듯

 

목 잘린 태양이 태아처럼 뒹구는 21세기 칼끝에 맺힌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는 발가락과 천둥번개를 먹고 자라는 머리칼 사이로 우리는 오늘도 어제나 내일처럼

식상하게 태어나거나 새롭게 죽어갈 것이다

 

그대 잠시 한눈파는 사이 급소가 사라졌다 한번 더 목숨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적敵의 급소가 곧 나의 급소다, 장미 한 다발 하나 사들고

칼 받으러 간다

 

<미네르바 2008 여름호>

 

감성돔의 복화술複話術 /김 륭

 

1.

당신 또한 물고기와 말을 섞은 적은 없을 거요. 깜빡 죽은 듯 잠들었을 뿐인데, 잠들기 전 배가 고팠고 잠드는 일이 밥 먹는 일보다 골치 아파진 십분 전이었는지 백년 전이었는지 살짝, 궁금했을 뿐인데 서너 통의 폰이 울었소.

 

여긴 푹푹 찌는데 거긴 어떠냐? 그래, 이 찜통에 어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긴 늙으면 죽어야지. 어쨌거나 식은 밥이라도 물에 말아 꼭 챙겨먹어라. 쌀은 안 떨어졌냐?

 

빌어먹을, 산 놈 죽은 놈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폰 때문에 당신 또한 부르르 살을 떨어본 적은 있을 거요. 걱정 마. 요즘 세상에 쌀은 무슨, 간당간당 숨이 떨어져 간다는 입 꼬리를 감아올리는 아가미 사이로 쓰-윽 칼이 들어왔소. 칼질은 역시 어머니요. 칼잠 덕분이오.

 

별이 아빠, 별이 걱정은 마. 물 만난 물고기 같아. 워싱턴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거야. 그런데 당신은 재혼 안 해? 더 늙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어쩌란 말이오. 이미 여러 번 죽어보았다는 듯 감기지 않는 눈, 빛은 눈물을 금단추처럼 매달아 등을 떠밀지만 나는 돌아갈 집이 없소. 집 대신 죄를 짓고 산 것은 보다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그렇소. 한 번도 물고기와 살을 섞은 적은 없었지만 당신 또한 이런 말을 중얼거려보았을 거요. 더 이상은 뜨거워지면 안 된다, 이건 인간의 문장이 아니오. 도마를 침대로 사용하는 도다리가 침대를 도마로 개조한 내게 읽어주는 감성돔의 검게 그을린 피부요.

 

나는 머리 쪽으로 쏠린 피를 뽑기 위해 전화를 씹었소. 꾸역꾸역 씹었소. 미안하오, 나는 북어가 아니오. 복어로 살지도 못했소. 울컥 배를 갈라 내장을 긁어내는 칼날 휘둥그레진 생生의 통점을 한 치도 비켜가지 않는 목소리, 뚜뚜뚜 뚜뚜뚜……

 

큰 오빠? 아직 살아있네. 죽은 줄 알았잖아. 어쩜 전화 한 통 없어. 어디 아파. 폰은 왜 그래. 일부러 끊는 거야.

 

아니, 걱정 마. 폰보단 숨통 먼저 끊길 거야. 얼마나 다행이니?

……, 그래, 그러니까 신경 끊어.

 

2.

나는 지금 껌벅껌벅 눈만 살아 침대 위에 누워 있소. 눈물이 바짝, 말라붙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물고기를 부정할 순 없소. 횟집접시 위의 싱싱한 감성돔이 되어 옆구리를 읽고 싶을 때가 올 거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쿡쿡, 몇 통의 전화가 숨통을 찔러올지는 모르오.

 

<서정시학 2008 가을호>

 

남자의 꽃/김 륭

 

밥을 먹는 동안 몸이 물처럼 흘렀다는 걸 몰랐더구나. 이즈음 나는 불같이 지나간 연애의 걸음걸이가 매달렸던 눈썹 위 나무의자를 치웠다.

 

영혼의 도색이 많이 벗겨졌더구나. 바람을 인질로 잡고 사는 게 아니었다. 발바닥이 너무 질겨 코를 파던 꽃의 배후를 알겠더구나.

 

길에서 태어났으므로 집에서 기를 수 없는 네발 달린 짐승의 울음, 손목을 긋거나 혀를 잘라도 달랠 수 없는 말이 있더구나. 그대 언젠가 지워버린 뱃속의 아기처럼 나는 아무래도 고분고분 발굴될 수 없는 한점 바람의 핏덩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얻기 위해 꼬리를 잘랐으나 저기, 저 꽃들은

바람의 발바닥이 붉다는 농담 따위나 히죽히죽 건넸을 뿐

 

날이 갈수록 색을 더하는 여자가 내 안에 살고 있는 줄 몰랐더구나. 성기처럼 앉아 피를 돌리는 줄 비로소 알겠더구나.

 

미안하다, 늙어가는 게 미안한 일이어서 이즈음 나는 치사량의 나이를 먹고

눈물의 배후를 캐는 중이다.

 

<서정시학 2008 가을호>

 

애인愛人 / 김 륭

 

 

길 가다 뚝, 꽃 한 송이 꺾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늙기 전에 시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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