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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

동암 구본홍 2023. 8. 11. 17:48

비늘/김륭 <현대문학 2008. 10월호>

 

당신은 옷을 벗고 있는 중이고

나는 휘둥그레 뜬 눈을 당신의 배꼽에 매달고 있는 중이다

단추의 기원이다 

당신과 나를 위해 세상이 잠시 눈을 감아주는 순간이 있다

물고기가 잘라버린 혀를 하늘에서 만진 적이 있다.

늙은 오리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노란 물주전자처럼 앉힌 자리,

 팬지꽃 코사지 장식이 달린 당신의 드레스가 물비늘로 촘촘해지는 동안

 

나는 당신의 등 뒤에서 달을 꺼낸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촉감,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을 팔딱거리며 부패의 각을 세운 거다.

슬쩍 그림자를 벗어던진 새떼들 아니, 바람에 꿰인 생선구이 한 접시 까맣게

까맣게 떠가는 하늘 한 귀퉁이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빈곳을 떠오른 것이다.

길이 뒤엉킨 거미 뱃속에 걸린 날개를 만지작거리듯

침대 밑으로 벗어던진 당신 드레스와

내 줄무늬 양복은 애당초 단추가 달려있지 않았던 거다.

둥둥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몸을 바짝,

잡아당기고 있던 죽음의 각질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서로의 몸을 물처럼 통과하는 죽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희번덕거리기 시작하는 한밤의 갈증,

제 그림자를 물에 적시지 않는 물고기들에게 비늘은 옷이 아니라 단추다.

세상의 모든 눈이 반짝, 나와 당신의 급소를 꿰고 있다.

 

 

 

모기의 정체성/김 륭 <계간 신생 2008 가을호>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하나뿐인 목숨마저 갖다버릴 수 있는 것은,

몸이 너무 달아 왈칵 피가 우는 순간 절정을 맞는 입술이다

그러니까 나는 뜨겁다

너무 뜨거워 울었다 맴돌았다

오로지 당신만을 울며 맴돌다 피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 밤 내가 원한 것은 수박의 붉은 속살이 아니었다

당신이 뱉어낼 씨였다 미안하다,

하나뿐인 목숨을 둘로 쪼개 파들파들 웃어주고 싶었다

눈물보다 체온이 높아진 온몸이 살살 부풀어 올라 허공에 무슨 일이라도 저질 듯

꽃이라도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묘혈墓穴이다

사랑은, 오로지 당신을 뜨겁게 울며 맴돌다 절정을 맞는 모기의 가능성이다

 

 

 

거짓말 /김 륭 <계간 신생 2008 가을호> 

 

미안하오. 나는 감자였소. 거짓말을 살짝 보태면 고구마일 수도 있겠소.

참말이오. 솜털 보송보송한 당신에겐 거짓말이겠소. 복숭아에게 감자도 고구마도 거짓말일 거요.

 

가진 거라곤 눈물뿐이던 어머니마저 거짓말일 수 있겠지만 밥솥만은 믿어주시오. 웬만한 것은 밥솥에 쪘소. 밥물에 익혔소. 계란찜 하나에도 밥물이 뱄소. 밥물 가득 밴 계란찜 그 죽이는 맛 앞에 소금 간 맞춘 가스 불 계란찜이 어딜 감히 얼굴을 들 수 있겠소. 밥의 눈물 탓이오. 닭의 거짓말이 계란찜이라면 믿겠소? 어머니는 질질 코 흘리는 자식들마저 밥솥에 쪘소. 밥물에 익혔소.

 

참말이오. 밥풀 덕지덕지 붙은 감자가 바로 나였소. 고구마가 나였소.

당신이 그걸 안다면 거짓말이오. 눈곱만큼이라도 안다고 말하면 세상이 몽땅 거짓말로 변할 거요.

참 다행이오. 밥보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니, 밥의 눈물도 모르는 당신과 살을 섞을 수 있다니, 감자인 내가 복숭아의 거짓말이 될 수 있다니,

 

 

 

수박이 앉았다 가는 자리/김륭 <계간 문학마당 2008 가을호>

 

 땡글땡글 한때는 한여름 수박통보다 잘 익어 힘 꽤나 쓴다는 사내 몇은 아작 났을 거라 이놈저놈 모기떼처럼 앵앵거리던 눈빛 어매, 환장할 거

 

꼭지 떨어진 엉덩이 용케도 건져 올렸지만 몰랐던 거지 붉은 속살 넘보던 그 눈빛 퉤퉤 수박씨처럼 뱉어내던 시절   먼저 서리를 맞는 거라

 멋쩍다, 반백의 할머니

 

 축 처진 한쪽 어깨에 매달린 갈퀴 같은 손, 죽음에게 등을 보이기 싫다는 듯 툭툭 핏줄 불걱거리지만 한줄기 바람마저 더 이상 혀를 박지 않는 노구老軀

 

 복날의 뙤약볕 아래 엉덩방아 찧느니 불쏘시개로 타오르겠다는 듯 끙끙 손자 놈들 품에 안길 수박 한통 사들고 죽을힘 다해 오르는 언덕바지 너머

 

이 빠진 부엌칼 불끈 움켜쥐고 씨-익 단물 빠진 잇몸이라도 물어내고 싶은 곳

 

수박이 잠시 앉았다 가는 자리

 

밤새 희번덕 돌아누울 것 같은 그림자 밑으로 슬그머니 굴러들어간 할머니 엉덩짝이 쩍 갈라지는 자리, 수박이 너무 인간적인 방식으로 멀어지는 자리, 빙 둘러앉은 손자들 맛있게 수박을 먹고 할머니는 잊혀져갈 것이다

 

수박보다 빨리 수박씨보다 멀리

아주 멀리 뱉어질 것이다

 

 

 

키스의 기원/김륭 <계간 문학마당 2008 가을호>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판 위에 딱, 한 점이 남았다 지글지글

 

입은 죽어도 잠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증보다 물증을 남겨야 한다

몸을 피우던 죽음이 질겅거리다 딴전 피듯 뱉어낸

꽃술 저, 입술

 

까맣게 파리 떼처럼 새까맣게 삼겹살 한 점으로 달라붙었던 사람들 눈치껏

젓가락 내려놓고 내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저, 저 문을 열어

혀를 눕히지 못한다면 키스는 완성할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입을 빌려

까무룩 몸을 닫았다 가는 것이다 사는 게 미안해 너무 미안해서

죽음에게 잠시 혀를 빌려주는 것이다

 

 

 

실연失戀 / 김 륭 <다층 2008 가을호>

담배구멍 난 바바리코트 짜깁기하러 껑충, 복사뼈 위로 울긋불긋 발가락 튀겨놓는 구식양복 다림질하러 간다 은행나무 따라 오리나무 따라 몸 바꾸러 간다

 

너무 오래 입었다 바람 한 벌, 물 빠진 청바지처럼 한 백년쯤 갈아입지 않은 속옷처럼 낱낱이 실밥 터졌지만 꿰매지 못했다

 

바람아 불어라 죽은 맨드라미 꽃술보다 더 깊게

입술은 애당초 뿌리를 놓쳤다

 

내게도 낙엽이 있다

 

 

 

독사毒蛇 /김 륭 <다층 2008 가을호>

 

독을 품는 일보다 살맛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누군가의 목을 꽉 물어주는 순간보다 오래 살고 싶은 때가 있을까

 

저기, 대가리 치켜든 독사 한 마리 질질

 

제 꼬리처럼 땅바닥에 끌고 가는 개구리보다 밥맛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울기 좋은 곳을 찾아내는 일보다 달콤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보다 징글맞고 치명적인 독이 어디 있을까

 

밥보다 오래된 독이 어디 있을까

 

 

 

파란바지를 입은 소년/김륭 <문학나무 2008 가을호>

 

빨랫줄에 거꾸로 매달린 아버지 물 빠진 청바지에서 흘러내렸다

주르륵, 파란바지를 입은 소년이 걸어간다

한 올 한 올 파랗게 소년의 바지에서 바람이 풀려난다

시냇물이 졸졸 소년을 따라간다

바늘에 실 따라 가듯 구불구불 논두렁이 따라가고

빨강내복을 입은 소녀가 염소처럼 끌려간다

호주머니 가득 새소리 구멍 난 양말 속에 벌레소리 집어넣고

파란하늘을 입은 소년이 걸어간다

빨강내복을 입은 소녀가 군대를 데리고 쫓아간다

결혼이 따라가고 이혼이 팔짱을 낀다

파란하늘이 희끗희끗 닳아빠지도록 소년이 걸어간다

바람 한 점 통 하지 않는 얼음장 밑으로

하늘하늘 걸어 들어간다

빨강내복을 입은 소녀가 운다 파랗게

새파랗게 질린다

 

바람의 육체/김륭 <문학나무 2008 가을호>

 

몸 안에서 죽은 시간이 머리카락으로 자라

들어 올린 머리, 팔베개 할 수 없는 달의 무덤가로 훌쩍 키만 자란

바람이 울어 자꾸 울어 손발만 그려주면 사람이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당신 

 

털썩, 주저앉아 바닥칠 수 없는 나무를 갈비뼈 삼아 육체를 드러내는 당신은 라면박스로 집 지어준 새끼고양이 같아서 우리 어머니 죽어서도 고삐를 놓지 않을 송아지 같아서

운다 자꾸 울어서 죽지 않는다 살아서 울며

울어서 죽음마저 깨운다

 

울어라, 울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울음의 솔기가 풀릴 때마다

돋보기 쓴 어머니 바늘에 실 꿰고 나는 낮은 지붕 위로

가만히 눈물 한 장 더 얹어둔다

 

문 쪼매 열어봐라

너그 아부지 왔는갑다

 

♧시작노트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입안에 진실이 담겨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혀는 보다 싱싱한 죽음을 위해 키우는 한 마리 물고기, 붉은 살을 가진 바닷물고기처럼 싹둑 눈꺼풀이라도 잘라내야 하는 걸까. 울음마저 너무 말라비틀어진 탓일 것 같다. 요즘은 자주 구름이 얼굴을 만지러 내려온다.

 

 

 

추파춥스/김륭  <계간 너머 2008 봄호>

 

혼자 밥 먹을 때면 스르륵 떠오르는

얼굴을 달에게 물었다 말이 없었다, 달은 당연히 물어올 줄 알았다는 듯

이젠 지겹다는 듯

 

그리하여 나는, 내 그림자를 독립시켜줄 때가 왔다고 믿는다

담벼락 기어오르던 오줌줄기를 싹둑 자른 다음

하나뿐인 숟가락을 달에게 쥐어주었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그림자를 침대로 사용하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속을 다 파먹어버린

달콤한 뒤통수였을까

 

불을 피우기엔 밑이 너무 그을렸고 펄펄 물을 끓이기엔

금이 너무 많이 간 얼굴, 새로 갈아 신은 양말을 뚫고 나온 발가락처럼

거울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직도 믿는다, 달에게 사탕을 물리면

그림자가 눈사람처럼 하얗게

빨갛게 파랗게

우리는 갑자기 태어났다가

문득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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