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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詩 모음

신춘문예 당선 시

동암 구본홍 2022. 11. 21. 11:37

[2007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정상혁

''하고 무사처럼 차분히 발음하면
입 안의 뼈들이 벼린 날처럼 번뜩이고
사방은 시위 당겨져 끊어질 듯 팽팽하다

가만히 입천장에 감겨오는 혀처럼
부드럽게 긴장하는 단어의 마디마디
매복한 자객단처럼 숨죽인 채 호젓하다

쏠 준비를 하는 순간 모든 게 과녁이다
호흡 없던 장면들을 노루처럼 달리게 하는
활활활 타오르게 하는 날쌔고 깊은 울림

허공의 누군가가 ''하고 발음했는지
별빛이 벌써부터 새벽을 담 넘어가
내일로 촉을 세운 채 쏜살같이 내달린다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눈길을 걷다
이서원 

앞 서간 어머니의 가슴 아린 발자국 길
혼자서 더듬더듬 그믐밤 걸어간다
눈 내린 책갈피에도 무릎 꺾어 세우며

손끝에 힘을 모아 온몸으로 읽는 음절
어두운 마음속을 뇌문(雷紋)처럼 뻗어 와서
하나둘 놓는 징검돌 꽃이 되어 피는데

점자가 등불이라면 손끝은 눈동자인 것
애벌레 기어가듯 느릿한 보행 끝에
아득히 잔돌들 박힌 길 하나가 열려온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
임채성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노란 물감 풀린 들녘 이랑마다 눈부신데
그 많던 사이프러스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소리가 죽은 귀엔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갸웃한 이젤 틈에 이따금 걸리는 햇살
더께 진 무채색 삶은 덧칠로도 감출 수 없네
폭풍이 오려는가, 무겁게 드리운 하늘
까마귀도 버거운지 몸 낮춰 날고 있다
화판 속 길은 세 줄기, 또 발목이 저려온다
모든 것이 떠나든 남든 내겐 아직 붓이 있고
하늘갓 지평 끝에 흰 구름 막을 걷을 때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염전에서
김남규

오늘도 서산댁은 낮은 바다 막고 선 채
뒤축의 무게로 새벽 수차를 돌린다
바람은 빈 가슴 지나 먼 바다를 일으키고

지친 오후 밀어내고 살풋 잠이 들자
잠귀 밝은 수평선 해류 따라 뒤척이며
뒤틀린 창고 이음새, 덴가슴도 삐걱인다

남편은 태풍 매미에 귀항하지 못했다
소금기 절은 목숨 몇 잔 술로 달랠 때
눈시울 노을로 번져 잦아드는 썰물빛

설움으로 풍화된 닻 말없이 내려두고
무명의 소금봉분, 메다 꽂힌 삽자루여
가슴엔 뱃고동 소리 야윈 달이 차오른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서울 황조롱이
김춘기

1.
비정규직 가슴 속에 안개비가 내리는 밤
여의도길 전주 한켠 둥지 튼 황조롱이
옥탑방 살림살이가 긴병처럼 힘에 겹다

2.
산 능선 너럭바위에
건들바람 불러 모아
풋풋한 날개 저어
억새 탈춤에 신명나면
제일 큰 나무에 올라
흐벅진 몸 곧추세우던 너

3.
오늘은 밤섬에서
찢긴 비닐 비집고는
마포대교 어깨에 앉아
깃털 훌훌 털어내고
북악산 여름 숲으로
건듯 날아오르는구나

4.
순환선 철길 위를 에도는 내 발자국
휴대폰에 떠오르는 눈빛 모두 잠재우고
물소리 푸른 강가에서 시계 풀고 살고 싶다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눈 속의 새
황성곤

광년을 달려와 빛이 된 투명한 새
망막에 앉은 기억, 때 늦은 아픈 고백
이른 봄
번갯불 튄 그대 스르르 한 점 불이었던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
이별 뒤 하얀 여백 지울 수 없는 허공 같아
가락지
흰 원을 걸어 필생의 울음 가둔 걸까
수축하는 잔등, 달이 팽창하는 저 언덕
환각처럼 눈 속의 새 쪼그려 앉아있는데
우수수
눈망울 털어내면 겨울 그 후, 빈 고요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염전에 들다.
연선옥

잇몸 다 드러내고 철썩이며 들먹인 어깨
얼마를 대끼고 대껴야 흰 뼈 되어 만날 건가
투명한 허물을 끌고 여기까지 흘러온 지금.

남은 상처 자투리를 누가 또 들여다보나
떠밀리고 넘어지다 등에 감긴 푸른 멍울
한걸음 이어달린 길, 그길 하나 밀고 와서.

낮은 데로 에돌아와 오랜 날 빗장 잠그고
옮겨 앉은 짭짤한 바다 거친 숨 몰아쉬면
바람결 다듬고 벼려 스스로 낮추는 키.

어디쯤 붙잡지 못한 잔별 죄 쏟아지고
햇빛 가득 그러모아 제 가슴에 피는 꽃들
몸 바꿔 떠나고 있나, 비탈진 세상을 향해.

 

[창조문학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향일암(向日庵)
양태지

신선이 머물던 자리 알 순 없지만
사바의 노여움은 저만큼 달아나네
하늘로 뻗쳐 오르는 저 바다의 용솟음

일만의 햇살이 번뇌를 잠재우랴
구름은 암석불 사이에 모로눕고
옷자락 저미며 가는 바람도 쉬어간다

오가는 사람마다 머뭇대는 바윗틈
님 향한 버거운 길 오롯이 떨치고서
보살은 속세를 나선 듯 염화시 합장하네

은은한 풍경소리 태고적 그대론데
남해라, 돌산에 갓 향기 매섭고요
해조음 드믄 암자에 독경만이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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