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 구본홍과 나눔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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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詩 모음

신춘문예당선 시 모음

동암 구본홍 2022. 11. 22. 14:27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009 한국일보 신춘문예]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

 

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2009 무등일보 신춘문예]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윤은희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2009 국제신문 신춘문예]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

가게 세 줍니다 / 유금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참새들은 날개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요. 가위로 꽃대를 자르다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가을이 이삿짐 트럭을 타고 지나간 다음 날 나는 보았죠.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비 내리던 가을 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방은 다시 문을 닫았어요.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2009 영남일보 문학상] 

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2009 한라일보 신춘문예]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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