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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구본홍과 나눔의 방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
꽃 덮개 첫눈 내리는 내 움막 마당에 목련 나무가 서 있다 피비린내 촉촉한 솜털 가지런히 침묵을 깨우며 꽃 덮개 활짝 열고 환한 웃음 뒤척뒤척 피우고져 올봄에도 어김없이 마당에 꽃덮개 툭툭 던져놓은 겨울이 오고 한 장 남은 달력 남은 날짜처럼 가지 끝 숨 모두고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사이 꽃 덮개 첫눈을 맞는다 기억에서 사라진 그 사람들 모습인 양 쥐색 빛 껍질에 파인 깊은 주름과 상처로 아문 흉터 군데군데 먹빛으로 얼룩처럼 새겨놓고 갈색 울음 얼어붙는 서러운 매듭 달 하얗게 그리움을 포박하며 서서 묵념에 잠긴 저 모습에서 묵언의 의미 전해 주던 가지 끝에 매달린 그 말씀 그 바람 소리가 지날 때마다 한 송이씩 하얀 눈밭 위로 적갈색 꽃덮개를 벗겨낸다 그 따뜻했던 소용돌이 빗금치고 지나간 자리 매운 매..
주산지 물빛 /조 성 문 청송땅 샛별 품은 갈맷빛 외진 못물 갓밝이 저뭇한 숲 휘감아 도는 골짝만 된비알 뼈마디 꺾는 물소리 가득하다. 호반새 울음 뒤에 퍼지는 새벽 물안개 실오리 감긴 어둠도 한 올씩 풀어내고 삭은 살 연기가 되고 재 되는 저 춤사위. 사는 일 짐 부려 놓고 제 거울 들여다보는 고요도 버거운 이 차갑게 돌아앉고 못 속에 누운 왕버들 퉁퉁 부은 발이 시리다. 숨 돌릴 겨를 없이 짙붉게 타는 수달래 먹울음 되재우고 저마 다 갈 길 여는가 내 앞에 툭툭 튄 물살 쌍무지개 지른다.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화첩기행/김종훈 오종종한 징검돌이 샛강 건너는 배경으로 미루나무 두엇 벗삼아 길나서는 물줄기와 기슭에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도 그려 넣는다 여릴 대로 여리더니 어깨 맞댄 물길들..
밤 夜 밤夜이 일어서다 전성기를 날려버린 어느 까만 긴 머리 여인 같다 이승과 저승을 지키며 별빛으로 외치는 측정 할 수 없는 거리 무중력 상태로 울긋불긋 풀어놓은 산의 빛 돌돌 말며 차갑게 가장 가난한 표정 짓는다 내 몸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의 모습 언제나 그를 만난다는 것 또 다른 운명으로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이는 것 이때 즘이면 하얗게 빛바랜 떠돌이 말씀들이 환한 풀 한 포기 일으켜 세우지 못한 얼어붙는 계절로 추락하고 있다 어둠, 어느 먼빛이 풍화된 뒷모습일 테지만 더 선명하게 출혈시키는, 이 고요 누군가 이 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외로워 흐느껴 울기도 하는 오직 번민 煩悶으로 빠진 무너진 돌담의 차가움에도 빈집 벽화에도 창밖 빨랫줄로 포박당한 버팀목에도 계절의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