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동암 詩 모음 (190)
동암 구본홍과 나눔의 방
세월 태어나기 그 이전부터 그는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발자국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 내가 가고 있는 그 자리로 그는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아주 먼데서 너는 나에게로 오고 나는 그렇게 또 너에게로 간다 아주 오랜 과거를 묻어가며 너는 지금 지나가고 있디 쉼 없이 오고 가는 너를 너를 멀리 허고 싶지만 멀리 할 수 없는 너 허공의 문을 열고 허공의 모습으로 허공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허공의 방으로 안내하는 나는 지금도 조금씩 너를 따라 가고 있다
고향 그때 그 곳에 흙담장위에 호박꽃 필 때 가고 머무르매 흙내음 피어나던 가깝고도 먼 곳 꽃구름 흘러가는 은 빛 하늘 말간 낮달 한 조각 누가 내 아려한 그리운 얼굴로 멀리 저 멀리 던져 놓았을까 누가 알랴 그리워서 더 그리워서 낮달은 뭉개구름사이로 지난 남루한 발자국처럼 들승날승 생각의 틈 새로 스며드네 그때 그 사람 같이 한 세월 수놓은 남녁 하늘 위 슬픈 미소로 멀리멀리 낮달 지금 그곳 내려 보고 있으리
흔적/동암 진난 폭우의 고통으로 흰 이빨 드러낸 나무등걸 자벌레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떨어진 마른 잎들이 수의처럼 입혀질 때 쯤 숲 속엔 소리 없는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몇 가닥 남은 혈류에 햇살의 온기 닿자마자 스스로의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몸 잃어키는 나무, 진즉에 고통 덜어주었어야 했던 허리뼈를 탈골된 나무 염을 하듯 나무등걸를 감고 오르던 보랏빛 칡꽃 넝쿨은 거친 숨 내뱉으며 야윈 온 몸를 간신히 붙들고 있다 상여 어깨에 메고 숲을 급히 빠져나간 물줄기 흘러간 자국마다 드디어 생의 이력만 묘비처럼 남은 속 뼈 불구의 몸 굳은 각질로 떨어져 있고 그동안 수없이 허공에 산란한 잎들은 공중 핑그르르 돌다 몇 잎 살포시 엎드렸다 주춤주춤 물러난다 숲의 변방에서 불구의 시간 견디고 떠난 방점사이로 칙칙하고..
기다리지 마라 기다리지 마라 이별한 그 사람 기억에 지워진 걸 모르니 기다린다는 것은 암벽화처럼 되는 것이니 바람소리 물소리 삼키며 침묵하게 되는 것이니 불평도 표정도 없이 망부석처럼 되는 것이니 공연히 다시 올 수 없는 사람 기다리지 마라 겨울이면 찬바람 가슴으로 품고 여름 뜨거운 햇살 풀빛으로 삼키며 깊은 산속 적막강산처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니 가을이면 기다리다 지친 나뭇닢이 얼굴 붉히며 떨어지는 것이니 기다리지 마라 살다보면 생각 데로 되는 일이 어디 있드냐 괜히 기다림의 올들 생각의 깊이에 담그지 말라 기다림의 페이지에 물 들이지 말아라 사는 것이 이별하며 사는 것이니 그립고 그리워도 지워지는 것이니 누이야 나는 바람이 머무는 곳에 머물다 가리 아마도 그곳엔 그리운 얼굴들이 있음을 구름같이 별빛같..